이번 학기는 화요일이 가장 힘이 빠지는 날이다.
아침 9시부터 수업이 있기 때문에, 주차를 하기 위해서 적어도 8시까지는 학교에 와야한다. 7시에 일어나는 것도 버거운 요즘의 나에게 화요일은 그야말로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기분이다. 대충 나갈 준비를 하고, 그이를 위해 스무디를 준비해 놓은 후 바삐 서둘러 문을 나선다.
학교에 도착한 후, 9시까지 수업 준비에 대한 마무리를 한다. 그리고 9시부터 1시까지는 쉴새없이 컴퓨터와 컴퓨터 사이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도와준다.
1시가 되서야... 이제 나의 시간.
대충 점심을 끝내고 나도, 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선 몇 시간 동안의 휴식이 필요하다. 이리 저리 웹서핑을 하면서 정신을 풀어주는 시간. 이런 시간이 없다면, 아마도 내 뇌줄이 파열될거야......!
이렇게 화요일을 보내고 나면, 나는 이미 한 주가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가올 새 일 주가 부담스러움으로...
박 미영.
Tuesday, August 31, 2010
Monday, August 30, 2010
Friday, August 27, 2010
병이다...
아침에 차 한 잔.
마음을 정화시켜주기도 하지만, 어제의 일을 반성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차와 함께 인터넷의 뉴스를 읽기 시작하면, 최악의 경우엔 반나절이 지나버리기도 한다. 아....
이건, 무슨 병이지......
박 미영
마음을 정화시켜주기도 하지만, 어제의 일을 반성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차와 함께 인터넷의 뉴스를 읽기 시작하면, 최악의 경우엔 반나절이 지나버리기도 한다. 아....
이건, 무슨 병이지......
박 미영
Saturday, August 21, 2010
횡설수설..
이상하다.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꼭 후회가 생긴다.
하고 싶은 말을 했지만,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온데 간데 없고, '말'만 남은 것 같다.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일까...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주저리 주저리 지껄인걸까.
떨고 놓고 나면, 남은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구태여 만나서 주절거렸던 것일까...
그렇게 외로운가...
그렇게 말이 하고 싶은가...
오늘도...
남은 건, 후회 뿐이다.
박 미영.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꼭 후회가 생긴다.
하고 싶은 말을 했지만,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온데 간데 없고, '말'만 남은 것 같다.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일까...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주저리 주저리 지껄인걸까.
떨고 놓고 나면, 남은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구태여 만나서 주절거렸던 것일까...
그렇게 외로운가...
그렇게 말이 하고 싶은가...
오늘도...
남은 건, 후회 뿐이다.
박 미영.
Wednesday, August 18, 2010
세례 성사
드디어 6개월 간의 예비자교리를 마치고,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아 세례를 받게 되었다.
세례명은 "클라우디아".
클라우디아에 대해 확실하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지만, 디모데후서에 바오로(남편의 세례명)를 뒷바라지 했다는 말씀이 있다. 또한 이해인수녀님의 세례명이기도 하다.
주일 아침, 다섯 명의 다른 예비자들과 함께 본당의 맨 첫 줄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어떤 분이 와서 세례명이 씌어진 꽃을 가슴에 꽂아준다. 그제서야 내가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신부님이 모두 곱게 차려 입었다고 즐거워하며 미소를 지어주신다.
착잡한 마음으로 6개월 간의 시간들을, 아니 내 생애의 모든 종교적인 생활을 되돌아보았다.
*
나는 한 번도 애써서 절대자를 찾거나 떠나 본 기억이 없다.
늘 하느님의 인도를 통하여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내 삶을 조명해 보는 것을 당연히 생각해왔던 듯 싶다. 그래..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주 어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다니던 교회도 특별히 별 거부감없이 혼자 가곤 했다. 시키지 않아도 일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티비에서 보여주던 아침 만화 영화의 유혹을 물리치고 교회로 향했고, 그 예배당 벽에 길게 걸려있던 성경 말씀에 위안 받았던 기억이 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그 땐 인생이 버거운 것도, 살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때인데도, 왜 그리 그 성경 구절은 내 가슴에 새겨져 내 안식처가 되었던 것일까.......!
그 후로도 그 구절은 학생으로서 시험공부(?)에 힘들 때나, 친구들과 다퉜을 때도 내게 힘을 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든든한 백이 있는 아이처럼, 내게도 그렇게 믿는 언덕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입학한 후엔 자연스레 기독교 학생 연합회라는 곳으로 등록을 했고, 교회 내 모임에도 열심으로 참여했다. 졸업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자발적으로 동네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갔다.
물론 미국에 와서도 당연하게 교회를 찾았고, 우연찮은 기회에 미국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젊은 미국인 목사의 열정에 찬 설교를 들으며-- 40%도 들리지 않았는데도--, 눈물을 흘리며 진한 감동에 전율하기도 했다. 더하여 미국은 선교와 전도의 본산지인 만큼 처음 온 외국학생들에게 매우 관대했고, 그렇게 봉사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느낀 교회 문화도 신앙적으로 매우 고무적이었다.
유학 생활 중 엄마가 많이 위독하셔서 잠시 귀국했다. 엄마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불교와 무속에 빠져 있었는데, 작은 언니와 막내를 통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시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신앙을 키우셨다. 놀라운 것은, 엄마는 투병 생활 중 한 번도 새벽기도를 거르시지 않으셨고, 철저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하루 하루를 열심히 생활하셨다. 살아 오신 날들을 돌아보며, 용서하기도 용서를 빌기도 하시면서, 천국을 향해 가는 즐거움으로 늘 성경과 찬송을 옆에 두셨다. 그것을 어여삐 보신 하느님은 엄마께 '권사'라는 직분을 주셨는데, 얼마나 감사하셨는지, 걸을 힘도 없도록 아프셨지만, 엄마는 그 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예쁘게 단장하고 색깔 고운 한복을 입으신 후 임명장을 수령하셨다.
그래...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고, 공동체를 믿었던가..
한 목사가 내게 보여 준 충격적인 '축재'와 '사이비 교주'와 같은 행각은 지금까지 내가 지녀 온 교회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무자비하게 깨뜨리고,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에 뿌린 내린 한국 교회의 실체를 알아가면서 그 폐단들 앞에서 망연자실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적어도 성직자는 금욕을 하며 축재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앙망해야 한다는, 당연하게 가져왔던 내 가치관은 현 한국개신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니 실행할 수 없는 어려운 모습일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고질적인 폐단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도저히 개신교를 내 신앙으로 뿌리내리기 힘들었다.
남편의 가족이 모두 카톨릭이고, 어머니는 늘 내가 개신교인 것을 걸리적거려 하셔서, 과감히 카톨릭으로 개종을 시도하고.. 6개월의 교리 공부를 마친 후, 드디어 세례 성사를 받은 것이다.
*
종교..
종교가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신앙인으로서 유일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내 종교 또한 많은 종교 중의 하나인 단지 '종교'일 뿐인지...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었고 앞으로도 나를 지켜주실 하느님을, 나는 믿는다는 것이고, 유일하게 존재하심도 믿는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종교인이 아니고, 열심히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한다 해도 종교인일 것이다.
내 종교는 내게 힘을 주고, 살면서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주고, 장군의 갑옷을 입혀 두려움을 물리쳐 주고, 판단이 흐려질 때 마다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나를 겸손하게 하고, 나를 강하게 한다. 또한 나를 편협하지 않게 하고, 내가 마음의 평강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나를 돌아보게 한다.... !
박 미영
세례명은 "클라우디아".
클라우디아에 대해 확실하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지만, 디모데후서에 바오로(남편의 세례명)를 뒷바라지 했다는 말씀이 있다. 또한 이해인수녀님의 세례명이기도 하다.
주일 아침, 다섯 명의 다른 예비자들과 함께 본당의 맨 첫 줄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어떤 분이 와서 세례명이 씌어진 꽃을 가슴에 꽂아준다. 그제서야 내가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신부님이 모두 곱게 차려 입었다고 즐거워하며 미소를 지어주신다.
착잡한 마음으로 6개월 간의 시간들을, 아니 내 생애의 모든 종교적인 생활을 되돌아보았다.
*
나는 한 번도 애써서 절대자를 찾거나 떠나 본 기억이 없다.
늘 하느님의 인도를 통하여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내 삶을 조명해 보는 것을 당연히 생각해왔던 듯 싶다. 그래..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주 어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다니던 교회도 특별히 별 거부감없이 혼자 가곤 했다. 시키지 않아도 일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티비에서 보여주던 아침 만화 영화의 유혹을 물리치고 교회로 향했고, 그 예배당 벽에 길게 걸려있던 성경 말씀에 위안 받았던 기억이 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그 땐 인생이 버거운 것도, 살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때인데도, 왜 그리 그 성경 구절은 내 가슴에 새겨져 내 안식처가 되었던 것일까.......!
그 후로도 그 구절은 학생으로서 시험공부(?)에 힘들 때나, 친구들과 다퉜을 때도 내게 힘을 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든든한 백이 있는 아이처럼, 내게도 그렇게 믿는 언덕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입학한 후엔 자연스레 기독교 학생 연합회라는 곳으로 등록을 했고, 교회 내 모임에도 열심으로 참여했다. 졸업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자발적으로 동네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갔다.
물론 미국에 와서도 당연하게 교회를 찾았고, 우연찮은 기회에 미국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젊은 미국인 목사의 열정에 찬 설교를 들으며-- 40%도 들리지 않았는데도--, 눈물을 흘리며 진한 감동에 전율하기도 했다. 더하여 미국은 선교와 전도의 본산지인 만큼 처음 온 외국학생들에게 매우 관대했고, 그렇게 봉사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느낀 교회 문화도 신앙적으로 매우 고무적이었다.
유학 생활 중 엄마가 많이 위독하셔서 잠시 귀국했다. 엄마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불교와 무속에 빠져 있었는데, 작은 언니와 막내를 통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시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신앙을 키우셨다. 놀라운 것은, 엄마는 투병 생활 중 한 번도 새벽기도를 거르시지 않으셨고, 철저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하루 하루를 열심히 생활하셨다. 살아 오신 날들을 돌아보며, 용서하기도 용서를 빌기도 하시면서, 천국을 향해 가는 즐거움으로 늘 성경과 찬송을 옆에 두셨다. 그것을 어여삐 보신 하느님은 엄마께 '권사'라는 직분을 주셨는데, 얼마나 감사하셨는지, 걸을 힘도 없도록 아프셨지만, 엄마는 그 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예쁘게 단장하고 색깔 고운 한복을 입으신 후 임명장을 수령하셨다.
병이 악화되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실 때도 늘 성경과 찬송을 떼지 않으셨고, 천국에 대한 기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셨다. 한 동안 못 보고 지낸 작은 엄마가 왔을 땐, 힘이 없어 말을 잘 못하실만큼 몸이 좋지 않았지만, 권사가 됐다는 말은 마지막 유언처럼 힘을 내서 남기셨다. 임종의 순간까지 하느님과 함께 하셨던 엄마는, 엄마가 그렇게 바라셨던 것처럼 천국에 가셨으리라 확신한다.
그렇게 엄마를 보내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후, 엄마가 못다 하신 봉사활동을 조금이나마 대신 하기 위해 한국 교회로 옮기고 그 곳에서 하느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한 전산 작업--주보와 설교 자료들을 맡아서 열심히 일하기도 했다.
한 목사가 내게 보여 준 충격적인 '축재'와 '사이비 교주'와 같은 행각은 지금까지 내가 지녀 온 교회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무자비하게 깨뜨리고,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에 뿌린 내린 한국 교회의 실체를 알아가면서 그 폐단들 앞에서 망연자실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적어도 성직자는 금욕을 하며 축재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앙망해야 한다는, 당연하게 가져왔던 내 가치관은 현 한국개신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니 실행할 수 없는 어려운 모습일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고질적인 폐단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도저히 개신교를 내 신앙으로 뿌리내리기 힘들었다.
남편의 가족이 모두 카톨릭이고, 어머니는 늘 내가 개신교인 것을 걸리적거려 하셔서, 과감히 카톨릭으로 개종을 시도하고.. 6개월의 교리 공부를 마친 후, 드디어 세례 성사를 받은 것이다.
*
종교..
종교가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신앙인으로서 유일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내 종교 또한 많은 종교 중의 하나인 단지 '종교'일 뿐인지...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었고 앞으로도 나를 지켜주실 하느님을, 나는 믿는다는 것이고, 유일하게 존재하심도 믿는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종교인이 아니고, 열심히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한다 해도 종교인일 것이다.
내 종교는 내게 힘을 주고, 살면서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주고, 장군의 갑옷을 입혀 두려움을 물리쳐 주고, 판단이 흐려질 때 마다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나를 겸손하게 하고, 나를 강하게 한다. 또한 나를 편협하지 않게 하고, 내가 마음의 평강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나를 돌아보게 한다.... !
박 미영
Friday, August 13, 2010
신뢰
오랜만에 아침부터 부산을 떨면서,
School of Education 에 있는 한국인 교수를 만나기 위해 JRP hall 로 향했다.
106 도가 넘어가는 날씨라서 그런지 아침부터 뜨거웠다.
한눈에 전형적인 '열공파'로 보이는 교수는, 이미 걸어온 자신의 인생 여정과 비슷한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한 시간 반을 할애해 주었다. 가능한 한 많이 도움을 주기 위해 여러 가지 경험담을 알려주고, 자신이 그 자리에 있게 된 이유 등을 알려주었는데, 들어보니 참 열심히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등생 특유의 집중력과 비사교성이 농후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공부벌레들의 특성인지라... 그래도 일반적인 한국 남자들과는 다르게 유창한 영어 실력이 대화 중에 여실히 드러난 것은 의외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수는 본인의 연구 이외엔 '관심 분산'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하여, 딱히 조력자가 필요하지 않는--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기에, 내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일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임이 대화를 끝내며 방을 나서는 내게 눈을 들지 않는 모습을 보며 확실히 깨달았을 뿐이었다.
다시 뜨거운 태양 빛을 향해 나서보니 더위에 숨이 턱 막힌다는 사실이 내 진로에 대해 턱 막히는 막막함 보다 더 가까이 다가왔다.
**
저녁 나절에 가게로 찾아 온 마리아 언니네와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투고해 오라고 종욱씨가 전화를 했다. 대충 중국 음식을 4인분 사서 가게로 가보니, 전기공사에 대한 얘기가 한창이다. 마리아 언니와 일요일에 있을 세례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신부님과 성당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눴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문득 언니가 참 가족같이 느껴졌다. 때론 나와 의견이 다르고,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고지식한 면이 너무 강한 언니가 답답하기도 하고 싫기도 했는데, 뭐 그게 나 뿐이랴.. 언니도 내가 싫기도 하고, 건방져 보이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한결같이 평상심을 유지하는 언니 모습에 참 숙연해질 때가 많다. 나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감정의 시이소오에 오래 타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늘 한결같다는 것..
그 자리에 항상 있는다는 것..
어쩌면 신뢰를 쌓는 첫번 째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박 미영.
School of Education 에 있는 한국인 교수를 만나기 위해 JRP hall 로 향했다.
106 도가 넘어가는 날씨라서 그런지 아침부터 뜨거웠다.
한눈에 전형적인 '열공파'로 보이는 교수는, 이미 걸어온 자신의 인생 여정과 비슷한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한 시간 반을 할애해 주었다. 가능한 한 많이 도움을 주기 위해 여러 가지 경험담을 알려주고, 자신이 그 자리에 있게 된 이유 등을 알려주었는데, 들어보니 참 열심히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등생 특유의 집중력과 비사교성이 농후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공부벌레들의 특성인지라... 그래도 일반적인 한국 남자들과는 다르게 유창한 영어 실력이 대화 중에 여실히 드러난 것은 의외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수는 본인의 연구 이외엔 '관심 분산'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하여, 딱히 조력자가 필요하지 않는--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기에, 내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일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임이 대화를 끝내며 방을 나서는 내게 눈을 들지 않는 모습을 보며 확실히 깨달았을 뿐이었다.
다시 뜨거운 태양 빛을 향해 나서보니 더위에 숨이 턱 막힌다는 사실이 내 진로에 대해 턱 막히는 막막함 보다 더 가까이 다가왔다.
**
저녁 나절에 가게로 찾아 온 마리아 언니네와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투고해 오라고 종욱씨가 전화를 했다. 대충 중국 음식을 4인분 사서 가게로 가보니, 전기공사에 대한 얘기가 한창이다. 마리아 언니와 일요일에 있을 세례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신부님과 성당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눴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문득 언니가 참 가족같이 느껴졌다. 때론 나와 의견이 다르고,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고지식한 면이 너무 강한 언니가 답답하기도 하고 싫기도 했는데, 뭐 그게 나 뿐이랴.. 언니도 내가 싫기도 하고, 건방져 보이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한결같이 평상심을 유지하는 언니 모습에 참 숙연해질 때가 많다. 나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감정의 시이소오에 오래 타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늘 한결같다는 것..
그 자리에 항상 있는다는 것..
어쩌면 신뢰를 쌓는 첫번 째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박 미영.
블로그를 개설하다...
나의 블로그를 정의:
- 살아가는 것이 녹녹치 않은 현실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기록하면서 나를 찾아가는 과정.
- 나를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한 나의 작은 시도.
- 일상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기록하여 '잊혀지지 않는' 나의 자취를 남기는 곳.
- 진실과 진리, 그리고 추측과 사실 사이에서 나의 균형을 찾는 곳.
-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그릇을 넓히기 위한 장.
- 심심할 때마다 들어와 끄적이는 나의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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