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은 "클라우디아".
클라우디아에 대해 확실하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지만, 디모데후서에 바오로(남편의 세례명)를 뒷바라지 했다는 말씀이 있다. 또한 이해인수녀님의 세례명이기도 하다.
주일 아침, 다섯 명의 다른 예비자들과 함께 본당의 맨 첫 줄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어떤 분이 와서 세례명이 씌어진 꽃을 가슴에 꽂아준다. 그제서야 내가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신부님이 모두 곱게 차려 입었다고 즐거워하며 미소를 지어주신다.
착잡한 마음으로 6개월 간의 시간들을, 아니 내 생애의 모든 종교적인 생활을 되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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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번도 애써서 절대자를 찾거나 떠나 본 기억이 없다.
늘 하느님의 인도를 통하여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내 삶을 조명해 보는 것을 당연히 생각해왔던 듯 싶다. 그래..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주 어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다니던 교회도 특별히 별 거부감없이 혼자 가곤 했다. 시키지 않아도 일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티비에서 보여주던 아침 만화 영화의 유혹을 물리치고 교회로 향했고, 그 예배당 벽에 길게 걸려있던 성경 말씀에 위안 받았던 기억이 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그 땐 인생이 버거운 것도, 살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때인데도, 왜 그리 그 성경 구절은 내 가슴에 새겨져 내 안식처가 되었던 것일까.......!
그 후로도 그 구절은 학생으로서 시험공부(?)에 힘들 때나, 친구들과 다퉜을 때도 내게 힘을 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든든한 백이 있는 아이처럼, 내게도 그렇게 믿는 언덕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입학한 후엔 자연스레 기독교 학생 연합회라는 곳으로 등록을 했고, 교회 내 모임에도 열심으로 참여했다. 졸업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자발적으로 동네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갔다.
물론 미국에 와서도 당연하게 교회를 찾았고, 우연찮은 기회에 미국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젊은 미국인 목사의 열정에 찬 설교를 들으며-- 40%도 들리지 않았는데도--, 눈물을 흘리며 진한 감동에 전율하기도 했다. 더하여 미국은 선교와 전도의 본산지인 만큼 처음 온 외국학생들에게 매우 관대했고, 그렇게 봉사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느낀 교회 문화도 신앙적으로 매우 고무적이었다.
유학 생활 중 엄마가 많이 위독하셔서 잠시 귀국했다. 엄마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불교와 무속에 빠져 있었는데, 작은 언니와 막내를 통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시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신앙을 키우셨다. 놀라운 것은, 엄마는 투병 생활 중 한 번도 새벽기도를 거르시지 않으셨고, 철저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하루 하루를 열심히 생활하셨다. 살아 오신 날들을 돌아보며, 용서하기도 용서를 빌기도 하시면서, 천국을 향해 가는 즐거움으로 늘 성경과 찬송을 옆에 두셨다. 그것을 어여삐 보신 하느님은 엄마께 '권사'라는 직분을 주셨는데, 얼마나 감사하셨는지, 걸을 힘도 없도록 아프셨지만, 엄마는 그 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예쁘게 단장하고 색깔 고운 한복을 입으신 후 임명장을 수령하셨다.
병이 악화되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실 때도 늘 성경과 찬송을 떼지 않으셨고, 천국에 대한 기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셨다. 한 동안 못 보고 지낸 작은 엄마가 왔을 땐, 힘이 없어 말을 잘 못하실만큼 몸이 좋지 않았지만, 권사가 됐다는 말은 마지막 유언처럼 힘을 내서 남기셨다. 임종의 순간까지 하느님과 함께 하셨던 엄마는, 엄마가 그렇게 바라셨던 것처럼 천국에 가셨으리라 확신한다.
그렇게 엄마를 보내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후, 엄마가 못다 하신 봉사활동을 조금이나마 대신 하기 위해 한국 교회로 옮기고 그 곳에서 하느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한 전산 작업--주보와 설교 자료들을 맡아서 열심히 일하기도 했다.
한 목사가 내게 보여 준 충격적인 '축재'와 '사이비 교주'와 같은 행각은 지금까지 내가 지녀 온 교회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무자비하게 깨뜨리고,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에 뿌린 내린 한국 교회의 실체를 알아가면서 그 폐단들 앞에서 망연자실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적어도 성직자는 금욕을 하며 축재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앙망해야 한다는, 당연하게 가져왔던 내 가치관은 현 한국개신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니 실행할 수 없는 어려운 모습일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고질적인 폐단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도저히 개신교를 내 신앙으로 뿌리내리기 힘들었다.
남편의 가족이 모두 카톨릭이고, 어머니는 늘 내가 개신교인 것을 걸리적거려 하셔서, 과감히 카톨릭으로 개종을 시도하고.. 6개월의 교리 공부를 마친 후, 드디어 세례 성사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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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종교가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신앙인으로서 유일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내 종교 또한 많은 종교 중의 하나인 단지 '종교'일 뿐인지...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었고 앞으로도 나를 지켜주실 하느님을, 나는 믿는다는 것이고, 유일하게 존재하심도 믿는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종교인이 아니고, 열심히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한다 해도 종교인일 것이다.
내 종교는 내게 힘을 주고, 살면서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주고, 장군의 갑옷을 입혀 두려움을 물리쳐 주고, 판단이 흐려질 때 마다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나를 겸손하게 하고, 나를 강하게 한다. 또한 나를 편협하지 않게 하고, 내가 마음의 평강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나를 돌아보게 한다.... !
박 미영
말씀하신 어머님의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이 여기에 적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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